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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증언









어느 국방 사이트의 <생존장병 증언 기사>

  번호 98319  글쓴이 하2  조회 1028  누리 95 (95,0, 17:5:0)  등록일 2012-3-15 05:48 대문 10 [천안함]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1142

 

우익을 표방하는 국방사이트인데...

그들의 견해를 그리고 관심사를 좀 들여다 보았습니다.

매우 관심이 가는 것도 있고, 뭐..그렇습니다만,

악세사리 정도의 관심으로는 생존장병기자회견에 대한 그들의 정리..입니다.

같은 듯...약간 다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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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생존장병 증언으로 본 당시 상황

written by. 강치구

   천안함 생존장병들은 사고해역에서 특별한 '상황'없이 정상기동중이었고, "외부충격에 의해 침몰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화약냄새를 맡거나 화염을 본 적이 없다"며 내부폭발 가능성을 배제하면서도, "(외부충격에 따른) 물기둥도 본 적은 없다"고 증언했다.
사고 발생시각에 대해서는 모니터화면 시각을 근거로 국방부 추정시각(오후 9시22분)보다 1∼2분 후인 오후 9시23∼24분으로 기억했다.

◇사고해역 왜 갔나..사고직전 상황은
최원일 함장은 천안함이 백령도 가까이 운행한 데 대해 "20개월 근무해 누구보다 사고 해역을 잘안다. 16회 정도 작전했는데 주 임무는 '도발대비태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정상기동중이라고 밝혔다.

   작전관 박연수 대위는 "사고직전까지 정상근무중이었고 특이사항이 있으면 제게 보고됐을 것이다. 따로 보고된 사항은 없는 걸로 기억한다. '상황'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없었고 특별상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음파탐지병인 홍승현 하사도 "음탐기상 특별 신호없었고 정상근무였다"고 했다.

   기관장 이채권 대위는 "상황이 있으면 고속추진기관을 작동해야 하지만 (작동이)없었다"고 말했다.

   ◇천안함 침몰시각 및 당시 상황은
작전관 박연수 대위는 "당직사관으로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각을 컴퓨터 모니터로 확인했는데 21시24분이었다. 그러나 (컴퓨터 오차에 따라)정확한 시각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

   최원일 함장은 "KNTDS 자료 검색중에 우측화면에 모니터상에 23분을 확인했다"며 "매시간 2번 기상보고하고 정시 30분한다. 저희는 5-6분 전에 해 그 정황으로 25분으로 보고했다"고 말했다.

   통신장 허순행 상사는 "21시14분부터 18분까지 전탐실 후부계단에서 집사람과 딸과 임신상태 등에 대해 통화했다"고 전했다.
침 몰당시 상황에 대해 병기장 오성탁 상사는 "지하2층 격실에서 순간 '쾅'하는 귀가 아플 정도의 큰 소리와 함께 몸이 붕뜨고 정전됐다. 앞에 컴퓨터가 얼굴을 쳤고 정신을 차리니까 암흑이었다. 발밑에 걸려 만져보니 출입문이 발밑에 있었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집기를 치우고 15분만에 나왔다"고 진술했다.

   전탐장 김수길 상사는 "'쿵'하고 '쾅'하는 소리를 자세히 들었다. 3-5초 꽝하고 90도로 기울어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소화호스를 타고 탈출했는데 5-7분 걸렸다"고 했다.

   내연장 정종욱 상사는 "정전후 함미로 가서 전원복구 노력하려 했는데 함미가 절단되고 없어서 바다에 달빛이 반짝여 함미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구조과정 및 보고
최원일 함장은 "갇힌 상태에서 나를 구출하려는 통신장에게 상황보고하라고 했고 포술장 김광보 중위가 상황보고했다고 보고받았다. (구출된 이후) 정다운 중위 등 2명 위치시키고 구조상황듣고 방송형식으로 보고하라고 했다 '뭐에 맞은 것같다'고 장교들끼리 얘기했다"고 말했다.

   포술장 김광보 중위는 "휴대폰으로 함대 작통실에 전화했고 정신이 없어 상황장교에게 제 위치와 눈에보이는 상황 등을 두서없이 통화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작전관 박연수 대위은 "좌현 통로로 외부에 나온 이후 구조세력이 왔을때 선체에 접근해 어느방향으로 대원 이함시킬지 함장에게 지시받았다"고 전했다.

   통신관 박세준 중위는 "전통상황실에 근무했는데 많은 장비가 아래도 떨어져 끼인 대원들 구조했고, 2명의 하사를 구조한 이후 올라와서 추워하거나 불안해하는 대원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환자를 먼저 구조되도록 했고 인원관리에 신경썼다"고 했다.

   김덕원 소령은 "외부도어를 풀고 나와 제일 먼저 갑판에 올라와 확인하니 함미가 보이지 않았고 외부갑판으로 승조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최원일 함장은 "해경에 편승해 장병은 해경정 침실로 배치되고 저는 명단파악하며 보고를 했다 휴대전화 회수했는데 환자가 많아서 누가 있다 없다 혼란이 있을까봐 그랬다"고 말했다.

   ◇침몰 원인 및 물기둥 여부 등
조타장 김병남 상사는 "배가 암초나 사주(모래톱)에 걸리면 기본적으로 찢어지는 소리가 나거나 출렁거린다"며 "이번 사고는 외부 충격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병기장 오성탁 상사도 "화약냄새가 없었고 화염도 없었다"며 내부폭발에 대해 부정적으로 봤다.

   갑판병 황보상준 일병은 9시16분 백령도 초소에서 미상소음을 들었다는 군 발표에 대해 "함교 좌현 외부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고 일체 아무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통신장 허순행 상사는 "특이상황으로 인근 함수 함대로 보고가 되는데 유무선 통신망에 보고되지 않았다. 안쪽에선 일체 안 들렸다"고 했다.

   후타실에서 5명이 실종된 데 대해 병기장 오성탁 상사는 "침몰 1시간30분 전에 후타실에서 운동했고 후타실에서 실종된 5명은 항상 그곳에서 운동을 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고 전했다.

   천안함의 안전상태에 대해 이채권 대위는 "물이 샌다고 말하는 것은 경험이 적은 병사가 파이트에 맺힌 응결수가 떨어지는 것을 오해하는 수가 많다. 물이 스며드는 것은 없었다 서면으로 작성해줄수 있다. 출항 2-3일전부터 작동하기 때문에 노후나 장비 이상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konas)

코나스 강치구 기자

 

다시 한 번 이 증언을 보고 있자니, 느낌이 정리되는 듯도 합니다.

 

수 많은 관심사항중에서 하나만을 주의깊게 살펴보자면...

맨 마지막에.....

< 1시간 30분 전에 후타실에서 운동을 하고...> 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에 속합니다. 어떤 의문에 대한 확증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이것은 - 교대시간이 8시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12-4시 교대

4-8시 교대

8-12 교대

12-04 (새벽 ) 교대

04- 08 교대

08-12  교대로써...

4시간씩 1일 6교대, 3파트의 교대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천안함 사고 시각 9시 22분은 ( 21시 22분)

저녁 8시에 교대를 하고, 1시간 22분이 지난 시간이었다는 점입니다.

 

104명의 승선인원중에서, 최소한 60 여명은 휴식이나 취침중이어야 하고,

40명 정도만이 정상근무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안함 근무일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바로 이 교대인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알아도, 발견된 함미의 실종자들이 과연 어떤 분포를 가진 것이 정상적인지 비 정상적인것인지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후타실의 5명이 과연 그날 저녁 8시 교대근무자였는가? 그리고, 한 파트에서 함께 교대근무하는 같은 교대근무시간을 가지는 군인들인가만 알아도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근무일지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내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훌륭한 추리가 될 것입니다.

 

 

한가지 더 부연해서 추정하는 글을 덧붙여 보자면...

천안함이 좌초하였을 경우, 그것이 그 즉시 침몰하는 정도의 심각한 침몰이 아니여도, 교대를 하고 쉬거나 취침을 하는 대기자들을 총 집합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좌초의 크기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천안함이 일단 운항은 가능한 상황임으로 총 집합 혹은 전원대기 상태를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대신, 전 장교들이 취침이나 교대상태에 있지 않고 함교부근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천안함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고, 전원 집합이나 이함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기기 직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장교들을 함교에 모두 모아놓고......왜 함장은 함장실에 혼자 있었을까요?

함장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비밀리에 비밀스런 별도의 보고를 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문제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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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이 증언한 천안함 탈출상황 "영웅들"

[머니투데이 2010-04-09 17:33]  

[머니투데이 김태은기자][생존자들과 그들 부모 구술받아 정리]

지난달 26일밤 침몰한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장병들이 당시 전우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해군 공식블로그 '블루페이퍼'는 9일 오후 생존자들의 그들이 부모들을 만나 구술받은 당시상황을 공개했다. 이 글을 작성한 해군 공보과는 "생존자들이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있을 당시 찾아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며 "함이 반으로 갈라져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동료들을 구한 그들은 진정한 영웅"이라고 치하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은 자신의 co2 구명재킷을 부상당한 병기장 오성탁 상사에게 입히며 생존한 승조원들을 안심시키고 침착하게 구조 및 이함 절차를 밟은 것으로 전해졌다.

통신실에서 당직근무 중이던 허순행 상사는 망치와 15파운드 소화기를 이용해 함장실 문을 부수고, 소화호스를 이용하여 함장을 구조했다. 부장 김덕원 소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최초로 함 외부로 통하는 도어를 찾아 개방해 탈출로를 만들었다.

김병남 주임상사는 머리에 감은 붕대에서 피가 배어나오는데도 불구하고 함장의 지시를 받아 천안함의 가장 위쪽인 통신실 좌현 격벽에서 승조원들에게 행동지침을 내렸다.

천안함 1층 상비탄약고에서 근무 중이던 안재근 상병은 '쾅'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플래시로 포술부, 작전부 승조원 침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함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갑판에 있던 육현진 하사는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 있으니 절대 물에 뛰어내리지 말라는 선임 부사관들의 지시에 따라 주변 동료들과 서로 몸을 손으로 비비고 마사지를 하며 체온을 유지했다”고 증언했다.

전투상황실 이연규 하사는 하반신 경련 증상으로 움직일 수 없게된 서보성 하사를 업고 이동했다. 작전관 박연수 대위는 함교에서 오른쪽으로 튕겨나간 대원들을 부력방탄복과 co2 재킷을 착용시켜 함 외부로 구조했다.

함교 부직사관 이광희 중사도 함교 우현에 매달린 공창표 하사를 끌어올려 배성모 하사와 함께 좌현 격벽쪽으로 이동시켰으며, 몸으로 계단을 만들어 함교 출입문을 통해 탈출 시켰다.

이 중사는 또 위험을 무릅쓰고 우현으로 이동해 구명정을 터뜨려 사용할 수 있게 조치하고, 부상전지를 이용해 조난 위치를 알렸다.

안재근 상병은 침실을 뒤져 12켤레의 신발과 구급상자, co2 재킷 5개, 옷가지 등을 챙기고 속옷차림으로 대피해있던 승조원들을 구조했다. 손가락이 부러지고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전환수 이병을 구해 간부에게 인계하고 다시 승조원 침실로 뛰어 들었다.

원·상사 침실에서 취침 중이던 전자장 김정운 상사는 사고와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는 부상을 당한 김병남 상사, 오동환, 김덕수, 정종욱 상사를 탈출시키고 침실 내 남은 인원이 있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배가 우측으로 누워 천정이 되어버린 출입문을 향해 소화호스를 타고 5m 가량을 기어올라 탈출했다. 김 상사는 함 외부에서 한 쪽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던 신은총 하사도 구조했다. 이 때 쓰고 있던 안경은 김현용 중사의 것.

신 하사는 입원 중에 이때를 기억하며 “선배가 자기 안경을 벗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

사고 순간 전투상황실에서 근무 중이던 김현용 중사는 천장에 매달려 고통과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신은총 하사를 바닥으로 내리고, 자신의 안경을 씌워 주는 전우애를 발휘했다고 한다. (윗글과 위치가 안맞음.)

고속정이 다가오자 전자장 김정운 상사와 전탐 부사관 이연규 하사가 다리가 골절된 서보성 하사를 업고 고속정 접안 위치로 갔다. 계류(밧줄로 붙잡아 맴)가 불가능하자 김 상사는 바다에 띄워놓은 구명정으로 뛰어내려 3개의 구명정을 결박하고, 멀리 떨어져 나간 구명정 1개를 붙들었다.

한편, 갑판선임하사 김현래 중사는 각종 집기류에 깔려 부상당한 조영현 중사를 구조하고 전부화장실, 갑판행정실, 전자정비실에 남은 인원이 있는지 확인하고 함수로 탈출했다.

이때 40mm 포대 쪽에서 대기 중이던 환자 및 수병들에게 차례로 co2 재킷과 카포크 구명 재킷을 입혔으며, 소화호스를 끌고 함수 최전방 라이프라인에 매듭을 지어 이동경로를 확보했다.

부장 김덕원 소령은 천안함에서 이탈하기 전, 물속에서 탈출할 수도 있는 승조원들을 위해 구명정과 구명볼을 현장에 남겨뒀다고 한다. 최원일 함장은 해경 함정으로 이동 후에 구조된 승조원들을 안심시키고, 고속정으로 이동해 실종된 승조원들을 찾아 나섰다.

생존한 천안함 승조원들은 “생사를 가르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우리 모두는 침착하고 훈련한 대로 행동했다”며 “아직도 물속에서 고통스러워 할 전우들을 생각하면 또 다시 눈물이 흐른다. 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그들의 생환을 기원했다.


김태은기자 te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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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 모습 떠올라… 제발 TV 좀 치워주세요”
2010-03-31 03:00 2010-03-31 17:50 여성 | 남성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나만 즐거워할 수는 없다”
가족들 와도 “돌아가세요” 면회 거부하고 잠도 못 자

폭발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둠에 잠겼을 때 강태영 병장은 부모님을 떠올렸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부모님을 한번이라도 더 뵐 수 있었으면….” 그는 허리와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살았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28일 어머니는 아들이 입원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립던 아들을 꼭 껴안고 놓지 않는 어머니에게 강 병장은 “이제 그만 가시라”며 손사래를 쳤다. “나만 부모님 만나 즐거워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해군 초계함 천안함 침몰 사고 발생 5일째인 30일 국군수도병원을 찾는 구조자 가족들의 발길이 부쩍 줄었다. 아직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장병들이 면회를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구조자들이 비교적 안정적이며 심리치료도 예방 차원으로 하는 것”이라 밝혔지만 실제로 많은 장병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다는 것이 가족들의 증언이다. 강 병장은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가족 면회조차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어머니와 큰형이 일요일 찾아가 만난 게 마지막이다. 강 병장의 큰형은 “첫날 면회 때도 잠시 보고 나니 ‘어서 가라’며 보냈다”며 “매일 가고 싶어도 태영이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면회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병장은 천안함에서 취사병으로 일했다. 매끼 직접 밥을 지어 퍼줬던 동료들이기에 실종 사실이 더욱 안타깝다. 특급요리사가 꿈인 강 병장은 평소 손님들에게 요리해주는 것을 즐겼다. 강 병장의 형은 “아홉 살이나 많은 형에게도 늘 밝고 까불까불하던 동생이었는데 말수도 줄고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며 “사고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고 안타까워했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 치료 중인 배성모 하사도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눈을 감으면 자꾸 사고 당시 상황이 떠올라 밤늦도록 눈을 뜨고 있다가 잠이 든다. 작은 소리에도 사고 당시 소음이 떠올라 잘 놀란다고 한다. 배 하사의 이모는 “면회 때 성모가 사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목소리가 떨려 알아듣기 힘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무척 힘들어 보여 그만 말하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사촌동생도 “평소 착하고 동생들을 잘 데리고 놀아줬던 오빠가 말수도 줄고 무표정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안석균 교수(45)는 “죽음의 공포를 겪으면 후유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사고 당시 들었던 ‘펑’ 소리가 맴돌면서 전화벨 소리에도 놀라게 되고 심한 경우 사고와 연관된 장소를 회피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TV 시청을 금지하고 있는 신은총 하사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방송에 나오는 사고 소식 때문에 자꾸 혈압이 올라 병원 측은 부득이하게 TV 시청을 막고 있다. 신 하사의 아버지 신원향 씨(57)는 “관심이 온통 동료들 소식에 있는 것 같다”며 “은총이가 형, 동생처럼 아끼던 사병들이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다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 신 씨는 누가 살았고 죽었는지, 실종자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천안함 함미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일부러 아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29일에는 반입이 가능한 CD플레이어와 심리치료용 음악을 챙겨가기도 했다.

가톨릭대 의대 정신과 채정호 교수(49)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장애도 무척 크다”며 “특히 군에서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황을 반복해 물어보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인 배려가 부족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성남=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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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생존자 증언] “쾅! 소리에 정전… 펑! 소리에 배가 90도 기울어”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침몰 13일 만에 공개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최원일 함장을 포함한 생존 승조원 58명 가운데 57명이 7일 오전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 강당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침몰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신은총 하사는 참석하지 못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7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천안함 생존 승조원 57명이 사고원인 규명 민·군 합동조사단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최원일 함장은 실종자들을 언급한 뒤 눈물을 훔치고(왼쪽), 정다운 중위는 고개를 떨어뜨린채 눈자위를 누르고 있다(왼쪽 두번째). 환자복을 입고 기자회견장에 나온 다른 장병들도 실종된 동료 생각에 눈물을 훔치거나 괴로운 듯 눈을 감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사고발생 보름이 다 돼가는데 가족들은 실종 장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함장도 살아있을 것으로 기대하나.

-(최원일 함장) 실종된 장병들이 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다는 희망을 계속 갖고, 복귀신고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고 해역에서의 주임무는 무엇이었나.

-(최 함장) 2008년 8월에 부임해 20개월 근무했다. 그 구역은 누구보다 자신있는 구역이고 16회 정도 경비했다. 주요 임무는 도발대비 태세 유지였다.

●정확한 사고발생 시간은

→사고 시각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과연 몇시 쯤 사고가 났나.

-(작전관 박연수 대위) 함교에 당직사관이 확인할 수 있는 컴퓨터 모니터가 있다. 마지막으로 직접 확인한 시간이 21시24분이다. 그 시간에 대해 정확성은 판단할 수 없다.

→9시16분쯤 백령도 방공진지에서 큰 소음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들린 게 있나.

-(통신장 허순행 상사) 9시14분부터 18분까지 통화를 했다. 함 내부에서 들렸다면 분명 전화를 끊고 상황파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들렸다.

-(갑판병 황보상준 일병) 9시16분 당시 좌현 함교 외부 당직이었다. 16분대에 일체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디젤엔진이나 기관실 등에서 폭발 소리를 들었나.

-(정종욱 상사) 함정이 6노트(11㎞) 저속일 때는 디젤엔진으로 기동한다. 군생활 17년 됐는데 배에서 폭발했다는 것은 전혀 들은 바 없다.

→포술장의 최초 보고 내용과 ‘피격’이라고 한 것의 의미는.

-(최 함장) 비상통신기와 휴대전화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가 계속 통신기를 잡고 있으면 현장 구조가 어려워 옆에 허순행 상사를 위치시켜 지시한 내용을 전파하라고 했다. ‘뭐에 맞은 것 같고 충격이 너무 컸다.’고 우리끼리 얘기했다.

-(김 광보 중위) 밖으로 올라가 휴대전화로 함대 직통실에 보고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 직통실 전화가 아니라 군부대 교환대를 이용했고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 안난다. 상황장교가 전화를 받았고 제가 처한 위치나 상황, 구조요청 등을 두서없이 말해서 기억이 안난다.

→함장이 사고시각을 침몰 다음날 27일 9시25분으로 했다가 28일 번복한 이유는.

-(최 함장) 당시 전술지휘체계(KNTDS) 컴퓨터 자료를 검색하던 중 우측화면에서 오후 9시23분으로 확인했다. 저는 사고 다음날 바로 현장에 가서 선체나 실종자 상황을 지휘, 보좌하고 있었다.

●사고 순간, 꽝 소리는 두번

→‘꽝’ 소리가 두 번 났는데, 파편을 본 사람 있나.

-(전 탐장 김수길 상사) 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꽝, 꽝’ 소리를 두번 느꼈다. 처음 ‘쿵’하는 소리는 어디에 부딪힌줄 알고 제가 바로 전탐실로 향했고, 이후의 ‘꽝’하는 소리는 약간의 폭음과 전등이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사고 순간에 폭발음이 났다고 발표가 됐다. 그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

-(병 기장 오성탁 상사) ‘쾅’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공중에 붕 떴고 정전이 됐다. 정신을 차려보니 암흑세계였다. 아무 것도 안보였다. 발밑에 걸리는 게 있어서 만져보니 출입문이 바닥에 있었다. 순간 다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90도로 기울었다. ‘쾅’ 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로 컸다. 문 주위의 컴퓨터책상이 모두 무너져 문이 안 열렸다. 가족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살겠다는 일념으로 손에 잡히는 집기를 모두 치워서 15분만에 밖으로 나왔다. 외부에 의한 충격으로 생각했다.

→화약 냄새라든지 폭발 징후라고 느꼈던 것들이 있었나.

-(오 상사) 제가 탄약을 담당하는 병기장이라서 잘 아는데 만약 화약이 있으면 불이 나고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그 순간 화약냄새는 전혀 안났다.

●사고직후 물기둥은 못봐

→갑판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나. 물기둥은 봤나

-(김 상사) 침실에 들어가는데 ‘쿵’ 소리 후 3∼5초 있다가 다시 ‘쾅’소리 났다. 90도로 배가 기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부 소화호스 타고 5∼7분 걸려 탈출하고 난 뒤 달빛 보고 외부로 향하려고 하는데 외부 함미가 없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함정은 야간이 되면 등화관제를 실시한다. 적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해 각종 문을 닫고 있다. 기본적인 항해등만 켜고 항해해 물기둥은 실제적으로 볼 수 없다.

→천안함이 오래됐다. 물이 새는 등 내부 문제는 없었나.

-(기관장 이채권 대위) 물이 샌다고 하는 경우는 잘 모르는 대원들이 함정 내부에 온도차에 의해서 파이프에 물이 맺히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외부에서 물이 스며드는 건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안전점검 받은 일자는.

-(이 대위) 부임한 지 50일 가량 됐는데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출항 2∼3일 전부터 작동을 시작하니까 장비나 선체의 노후는 아니라고 본다.

●해경 구조선에서 지휘보고

→사고 후 구조대가 오기까지 한시간 동안 함장 지시는. 뭐하고 기다렸나.

-(박 대위) 함교에서 좌현 통로로 외부로 나온 뒤 구조선이 오기 전까지 구조세력이 왔을때 선체에 접근을 해서 어느 방향으로 대원들을 이함시킬지 함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통신관 박세준 중위) 전투상황실 당직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장비들이 떨어졌다. 전탐실에서 끼어있었던 하사 2명을 구조한 뒤 올라와서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대원들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했다.

-(김 덕원 소령) 우현으로 배가 기울고 함장실 앞에 있는 외부 도어를 풀고 가장 먼저 올라왔다. 확인 결과 함미가 안보였다. 여러 대원들이 갑판 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밑에서는 함장실이 잠겨 있어서 풀려고 노력했고 함장이 구출된 뒤 인원파악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통신망으로 상황전파 후 침착하게 함장 지시에 따라 대처하면서 구조세력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사병들 가운데 함미를 사고 직후 본사람 있나. 구조 직후 함장이 말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나.

-(최 함장) 해경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나 는 사관실로 이동했고, 병들은 치료 휴식을 위해 해경정에 있는 침실에 배치됐다. 해경에서 지휘보고가 이뤄졌다. 참모총장, 작전사령관과 통화해 보고를 했다. 휴대전화 회수는 사실이다. 구조가 해경, 고속정 등 여러 곳에서 이뤄졌고 당시 피흘리고 다리 골절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혼란방지 차원이었다.

●다른 가능성은

→암초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김병남 상사) 암초에 걸리면 기본적으로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배가 출렁인다. 외부 충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초 상황시 사고 원인에 대한 보고는 없었나.

-(최 함장) 당시는 급박한 구조 상황이었다. 사고원인은 차후였다. 오후 10시32분 통화할 때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외부충격으로 느꼈다.

→어뢰, 기뢰, 암초, 내부폭발, 선체폭발 등 사고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최 함장) 정말 답답한 심정이다. 세상이 생명과 같은 천안함을 제발 있는 그대로 이해해줬으며 감사하겠다. 아직도 옆에있는 듯 장병들이 가슴에 묻혀있다. 누구보다 슬퍼할 실종자 가족들 생각 뿐이다.

●사고당시는 정상근무중

→사고 직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나. 비상상황인가 휴식상황인가.

-(박 대위) 함교 당직사관으로서 정상근무 중이었다. 특이한 일이 있었다면 나한테 보고가 됐을 거다. 따로 보고된 바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사고 직전이나 혹은 그 이전이라도 함정의 소나(음파탐지기)에 이상징후 포착된 것 있나.

-(홍승현 하사) 특별한 음탐신호가 없었다. 당직자는 정상근무였다.

→사고직전 외부와 통화했던 승조원들 어떤 내용으로 통화했나. 끊을 만한 상황이 있었나.

-(허 상사) 오후 9시14분부터 18분 몇 초까지 전탐실 후부 계단에서 집사람, 딸과 통화했다. 아내가 임신한 상태라서 관련해서 통화했고 딸에게는 엄마가 많이 힘드니까 도와주라고 했다. 이상 상황은 없었고 바로 통신실로 복귀했다.

-(기관장 이채권 대위) 기관장이 상황이 있거나 주로 근무하는 위치는 기관조정실이다. 당시 정말 특별상황이 있었다면 고속추진을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내가 당연히 기관조정실에 있어야한다.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후타실에 5명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 갔을 것으로 보나.

-(오 상사) 저는 운동을 좋아해 그 시간대면 거기 가 있는다. 사고발생 한시간 반 전에 가서 늘 운동했었다. 그날은 업무보고 때문에 후타실에 안 갔다. 추정되는 5명은 항상 운동하는 인원이다.

→함미부근 후타실에서 운동할때 어떤 복장으로 가나.

-(전준영 병장) 속옷 내의와 반바지를 입고 한다. 운동을 했다면 복장이 그랬을 거다. 나는 침실서 쉬고 있었는데 특별한 상황이 없었기에 속옷만 입고 있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2010-04-0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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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20대의 시작을 해군과 함께해서 중반까지 보냈던 해군..해군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냥 넘어가기엔  궁금한게 너무 많아서 몇자 적어보려합니다.

 첫번째 의문..

먼저 폭발이 일어났던 시간은 뉴스에서 보기로는 9시 45분으로

점호시간이었다고 하는데요.

출동시 점호시간은 9시 30분.

9시 15분에 점호 15분전 방송 나오고..

9시 25분에 점호 5분전..

9시 30분에 점호.

그러면 당직사관 부직사관이   

포갑부 - 작전부 - 기관부까지 차례대로 점호돌면

점호는 9시 45분이면 끝날즈음인데...

근데 가만..

근데 뒤에 있던 속초함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경고사격 5발 했었다면서요?..

옆배에서 경고사격 하는 중이면..

천안함은 점호 취소하고 당연히 전투배치 붙어있었을텐데?...

해군 나오신분들..

그게 상식아닌가요?.. 옆배에서 경고사격중인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점호 돌겠습니까?..

 

그리고.. 두번째 의문..

함교에는 말이죠...

기본적으로 통신망이 3개가 올라갑니다.

어선긴급망, 상선검색할때 쓰는 통신망. 그리고 하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함교에 있는 통신망으로 함대사령부와 교신 충분히 가능합니다..

함대상황실에서도 통신망 전부다 수신하거든요.

그리고 함교 바로 밑에 위치한 통신실에는 함대와 바로 교신이 가능한

통신망이 있구요..

마지막으로 함내상황실.. 상황실에도 통신망이 하나 들어갑니다.

이것역시 함대상황실과 바로 통신이 가능하구요..

그리고..

함내에 전기가 나가게 되면 바로 비상발전기 돌아가구요..

비상발전기 돌아가면 통신망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근데 함장이 휴대폰으로 보고를????...

이것도 뭔가 이상한걸요?...

 

세번째 의문..

작전회의 등을 위해 함교에 장교들이 전부다 모여있었다라...

그리고 당직근무를 위해 갑판쪽에서 근무하던 승조원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겠지만.

해군 나왔고 초계함에서 한번이라고 근무해본 사람들이라면

당직근무를 위해 갑판쪽에 근무하던 승조원들이 있었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것같습니다.

아.. 당직근무를 위해 갑판쪽에 나와서 근무하는 사람들.

딱 2명있네요. 함교에서 견시라고 하나요? 육안으로 멀리있는 물체를

식별하기 위해 함교 양옆에서 근무하는 당직병 2명.

이 두명 말고는 갑판쪽에 나와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없는데요?..

제말이 틀리다면 틀렸다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작전회의등을 위해 함교에 장교들이 전부다 모인다구요?.

작전회의를 위해서 모인다면 함장, 부장, 작전관, 포술장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전투정보실을 책임져야하는 전정관이 왜 함교에 있나요?

기관실을 책임져야하는 기관장은 왜 함교에 있었나요?

얼마만큼 위급한 상황이었길레 자기가 맡고있는 책임지역을 벗어났어야되었던건가요?

 

마지막으로..

함정이 완전히 가라앉는데 3시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 세시간동안 함장과 부장, 작전관, 포술장, 보수관, 통신관, 전정관, 갑판사관은 뭐했을까요?

이함명령 내려놓고서는  자기들 목숨 챙기기에 바빴나요?

함정인원의 절반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는데

그들은 당당하게.

한명도 죽지않고 무사귀환했네요.

아.. 죽지않고 살아온건 환영입니다.

누가 이야기한대로 고급장교들은 사병나부랭이(표현이 거슬린다면 죄송합니다.)들과는 달리

키우는데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니까요..

뭐. 해군출신이지만 해군 장교들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는 저로서는

이들이 무얼하고있었는지 정말궁금합니다.

그리고 살아돌아왔으면 제대로 된 장교들이라면

어제 하루는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 치더라도

오늘쯤은 뭐라고 말이 있어야되는거 아닌가요?

충격이 너무 커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있으신건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함구령이라도 내렸나요?

왜 아무런 말도 없는건지요.

정말 궁금합니다.

 

제발.

하루빨리 모든 상황이 설명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냥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들으면 누구나가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할수 있는 속시원한 설명말입니다...

 

이번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천안함 승조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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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천안함 침몰당시 실종자 46명중 32명이 선체후미 지하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 관계자는 "평소 천안함 승조원들이 침몰시각의 위치와 진술 등을 종합해 본 결과 32명이 기관부침실 등 선체후미 지하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29일 밝혔다.

천안함이 침몰한 시간은 오후 9시 30분으로 실종자 46명의 당시 위치가 모두 파악됐다. 침몰 당시 각 격실에 흩어져있던 장병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함 정의 당직근무는 함정의 형태, 임무 및 승조원의 구성수에 따라 적절이 편성된다. 당직편성은 항해 당직과 정박당직으로 구분되며 일반적인 당직편성은 당직사령, 당직사관, 부직사관, 당직하사관, 당직병으로 편성된다. 정박당직은 모항에 입항하여 대기, 수리 및 교육 훈련을 수행할 시 편성되며, 당직사령, 현문당직(당직사관, 부직사관, 당직하사, 당직병)과 기관당직(당직사관, 부직사관, 안전당직, 보일러 당직, 배전반 당직 등)으로 구분된다.

당 직근무는 1일 3직제로 1인이 교대로 8시간씩(주간 4시간, 야간4시간)연속적인 근무를 수행한다. 함정에서의 항해 중 오전임무는 야간당직자의 기상시간을 고려해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것이 관계적이다. 1일 24시간 당직근무가 계속됨에 따라 함정에 따라서는 심야 시간대(보통 00:00-04:00시) 당직 근무를 2시간씩 2개조로 나누어서 근무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Dog-Watch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한국해군의 함정에 따른 계급은 고속정 정장은 대위, 소령, 초계함 함장은 중령, 호위함 함장은 중령, 구축함 함장은 대령, 군수지원함은 대령, 청해진함은 대령이다.

 

최종수정 2010.03.29 16:23기사입력 2010.03.2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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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5·24 대북제재 조치 이후 게재 일자 : 2010년 03월 29일(月)

“구조함 접근에 배 크게 흔들려 뒤집힐까봐 다가오지말라 손짓”
생존자 최광수병장 상황설명 요즘미투데이공감페이스북트위터구글


지난 26일 밤 해군 초계함 천안함의 조타실에 근무하고 있던 최광수(22) 병장은 ‘꽝’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곧바로 정전이 돼 배 안은 암흑천지가 되고 배가 급격히 옆으로 기울었다. 순식간에 배 바닥이 벽이 될 정도였고 근무 중이던 후임 병사들이 조타실 핸들을 놓치고 나가 떨어졌다. 조타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외마디 비명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순간 전쟁이 났다고 생각한 최 병장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비상용 작은 칼을 끄집어냈다. 선임병인 그는 항상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이 칼을 휴대하고 있었다. 구명조끼는 곳곳에 비치돼 있어 착용이 가능하지만 CO2조끼(물에 닿으면 자동으 로 부풀어오르는 조끼)는 칼로 끈을 풀어야 착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기울어진 초계함 갑판 쪽으로 올라갔다. 갑판 위에는 2명의 사병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 함께 호루라기를 불고 정신없이 조명탄을 터트렸다. 어딘가에서 “함장이 갇혀 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른 사병들과 함장실로 간신히 다가가서 도끼로 문을 부수고 함장을 (갑판 위로) 끌어올렸다.

그와 최원일 함장은 선실 내에 갇혀 있던 사병들을 구하기 시작했지만 함정은 급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순간 함정으로 다가오는 해군 배(참수리호로 추정)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배가 큰 파도를 일으켜 초계함이 심하게 흔들렸고 가라앉는 속도가 빨라지는 듯했다. 그는 다가오는 배를 향해 “접근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며 손짓을 해댔다. 그러나 문제의 배는 최 병장의 손짓을 “살려달라”는 신호로 착각한 듯 계속 다가왔다. 그 사이 함정은 자꾸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함수 부분에 있던 최 병장과 사병들은 함장과 함께 갇혀 있는 사병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힘이 빠지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마침내 그는 최함장과 함께 해경 구조함으로 추정되는 배로 뛰어 내렸다. 최 병장은 당시 이 같은 상황을 27, 28일 해군 2함대사령부와 국군수도병원에서 만난 아버지 최종복(58·경북 경주시 노서동)씨에게 말했다. 최 병장은 2008년 5월 입대했으며 함정이 침몰되는 과정에서 목과 허리, 무릎을 다쳤다.

경주=박천학기자 kobbl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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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침몰] 수색 상황
"전쟁 났단 생각에 호루라기 불며 조명탄 쏴"
생존자들이 전한 사고 당시 증언

강주형기자 cubie@hk.co.kr
26일 밤 이은수(22ㆍ1월 의무병 입대) 이병은 천안호 갑판 밑 목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이 이병의 동기 한 명이 빨래 중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폭발음이 귀청을 때렸다. 순식간에 목욕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변했다. 쓰고 있던 안경까지 잃어버린 이 이병과 동료는 어두운 선실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침착하게 옷부터 입고 갑판 위로 올라가라"는 한 선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체 벽을 더듬으며 천천히 갑판 위로 올라갔다. 갑판에는 먼저 황급히 탈출한 다른 병사 수십 명이 몰려 있었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임병들은 급한 마음바다로 뛰어 내리려 했다. 하지만 선임병들은 "배가 완전히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있다. 먼저 구명조끼부터 입고 구조를 기다려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구조대가 큰 배(참수리호로 추정)를 이끌고 천안함 근처로 다가왔다. 선임병들은 그러나 "배가 너무 커서 천안함 가까이 오면 충돌 위험이 있다"며 손짓으로 막았다. 얼마 후 해경함정의 고속단정이 도착했고 소방호스를 잡은 채 차례차례 탈출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각 천안함 갑판 위 조타실에서 근무 중이었던 최광수(22ㆍ2008년 5월 입대) 병장은 '꽝'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곧바로 배 안은 암흑 천지가 됐고 배가 급격히 옆으로 기울었다. 조타실 내 10여명의 병사들은 서로 뒤엉켜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쟁이 났다'고 생각한 최 병장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휴대용 칼을 꺼냈다. 구명조끼는 곳곳에 비치돼 있었지만 칼로 끈을 풀어야 착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 쪽으로 올라가 미리 탈출해 있던 동료들과 함께 정신 없이 조명탄을 터트렸다.


그 때 어디에선가 "함장(최원일)이 갇혀 있다"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최 병장은 다른 사병들과 함장실로 간신히 다가가서 도끼로 문을 부수고 함장을 갑판 위로 끌어올렸다. 이후 배가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최 병장은 최 함장 및 동료들과 함께 바다로 뛰어내렸다. 나중에 보니 그는 최 함장과 함께 해군 배가 아닌 해경 배에 구조됐다.

이 같은 상황은 이 이병과 최 병장이 27, 28일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사령부와 국군수도병원에서 각각 아버지에게 전하면서 알려졌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설명한 상황도 비슷했다. 김 장관은 29일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 출석, "최 함장이 함장실에서 기절했다 깨 보니 출입구가 천장에 가 있었고, 부하들이 문을 뜯은 뒤 소방호스를 내려 줘 이를 잡고 올라갔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입력시간 : 2010/03/29 22:02:24  수정시간 : 2010/03/30 08: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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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죄` 함장 최원일 중령 <
"살아 돌아와 면목이 없습니다"

원인불명의 폭발로 침몰한 천안함 함장 최원일 중령(해사45기)은 지난 27일 평택 해군 2함대 사령부 브리핑 중, 실종자 가족 중 한명이 "함장이면 당신이 죽더라도 부하를 구했어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자 이같이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최 중령은 "함장으로서 한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장병들과 최선을 다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즉각 조치를 할 수 없었다"면서 "생존자를 끝까지 살리기 위해 줄, 로프, 소화호스까지 이용해 마지막 생존자 한명까지 구조하고 귀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종자 46명의 가족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최 중령에 대한 거센 비난 목소리가 일고있다.

이를두고 구조된 천안함 장병들과 대부분의 해군 관계자들은 평소 최 중령이 부하들을 친형이나 자식처럼 대하고, 작전수행 중에도 매우 침착하게 지휘하는 능력있는 함장이라는 점을 들어 속사정 모르는 여론의 뭇매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배와 구명정을 연결하는 줄을 잡고 있느라 늦게 탈출한 한 생존자는 "함장은 해경정이 오기 전까지 배에서 지휘하며 상황보고.구조요청 등을 했다"면서 "그래서 승조원들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함장이 지시하는 순서대로 배에서 구명정으로 차례로 옮겨타고 부상자들을 먼저 빠져나가도록 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생존자도 "함장은 (배와 구명정 사이의)줄을 잡고 있던 2명과 함께 마지막으로 배에서 구명정으로 내렸다"고 설명했다.

물에 빠져있던 생존자들은 고속정 스크류로 인한 와류, 혹은 접근하는 고속정 충돌로 인한 추가 사상자 발생을 우려했다.

그래서 고속정이 접근하자 "오지마!"라고 수차례 외쳤고, 이를 들은 고속정은 거리를 두고 파도를 막아주고 라이트를 비춰줌으로써 구명정을 거쳐 해경정 립(고속단정)으로 옮겨타는 것을 도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 중령은 휴대폰으로 지휘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구조를 요청했다.

이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28일 청와대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피해가 안타깝지만 그나마 초기대응이 잘 이뤄져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실종자가 나왔지만 해군의 초동대응은 잘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대구 청구고를 졸업한 최 중령은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있다. 가족들은 계룡대 주변 아파트에 살고 있어 1년 중 만나는 시간이 20일도 채 안된다.

시관학교 시절 모범생도들만 선정되는 명예위원을 거쳤으며 소령 때는 사관학교 훈육관으로 선발돼 2년간 해사 생도들을 가르쳤다.

해군 관계자는 "기습적인 외부공격이든 아니든 선체가 두동강나고 순식간에 침몰하는 불가항력적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함장은 부하들을 최대한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배를 지켰다"면서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항변했다.

[이유섭 기자]